가장 인상깊은 여름이 있을까요
이 레터를 받아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많은 여름을 지나오셨을 텐데요.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여름이 있을까요. 물론 있겠죠. 너무 더웠거나 별로 덥지 않았던 여름, 흠뻑 젖었거나 바싹 말랐던 여름, 신났거나 슬펐던 여름, 바빴거나 한가했던 여름.. 수없이 많이 지나온 여름 중 당신에게 깊이 남은 여름이 궁금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유럽에서 보낸 여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벌써 2년이나 지난 그때를 떠올리자면 아주 생생한 꿈 같습니다. 처음 유럽을 가기로 결정한 날도 똑똑히 기억이 나요. 혜은, 지하와 종묘를 걷던 도중 주현이에게서 오랜만에 카톡이 왔습니다. 한두 달 안으로 유럽에 갈 생각이 있냐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카톡을 본 순간 이미 가야겠다고 결정한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미 다녀온 지금은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요.
첫 장거리, 첫 장기 여행을 앞둔 두어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출국날 집에서 출발하면서 캐리어 손잡이가 고장났고요. 아부다비에서 갈아탄 비행기 좌석에서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바퀴벌레가 나왔어요. 꼬박 반나절 만에 땅을 밟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낯선 말씨를 가진 사람들은 자꾸만 일본에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그늘 없이 내리쬐는 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은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고, 주현이의 뒤꿈치에서 난 피가 반스를 적셨습니다.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가 운행을 하지 않아서 왔던 길을 뱅뱅 돌아 간 날도 있었고요. 나무 창문이 단단히 닫혀서 4박 5일 내내 에어컨 없는 방에서 선풍기 바람만으로 프라하의 여름을 견뎌냈지요.
그래서 그 여행의 그런 순간들이 제 기억에 남았을까요. 아니라는 건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저는 앞으로 그해만큼 찬란한 여름을 만날 수 있을지 겁이 납니다. 그 여름을 다시 겪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못지 않게 처절한 순간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2022년을, 그해 여름을 찬란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직사광선 아래서 4만 보를 걸은 날, 골목을 벗어나니 나타난 콜로세움, 정수리가 뜨거워질 때쯤 마신 시원한 탄산수, 라즈베리와 피스타치오, 레스토랑 못지 않았던 스위스 호스텔의 조식, 자료화면 같은 설산의 풍경과 궁궐, 보고만 있어도 사랑이 샘솟았던 야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온 반지 같은 것들이 빛을 내고 있어요. 물론 그보다도 더 빛나는 것들이 있지요.
떠나기 전 포스트잇이 붙은 생필품들을 바리바리 싸다 건네준 민지가, 이동수단에 탈 때면 무조건 창가 자리를 양보해주던 주현이가, 놓칠 뻔한 기차를 헐레벌떡 타자마자 웃으며 맞아주던 할머니가, 커다란 캐리어를 선뜻 내려주던 아저씨가, 그곳에서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저를 살게 했어요. 돌아와서도 말이에요.
앞으로 저는 지나온 것보다 더 많은 여름을 만나겠지요. 그해 여름보다 더 찬란한 여름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인상깊게 남은 여름은 어떤 여름이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