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손가락을 벤 적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얼음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었습니다. 단단히 언 얼음을 틀에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모나게 깨어진 얼음 조각에 손가락을 벤 것이지요. 얼음이 살을 베다니..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얼음은.. 몇 시간 동안 냉동실에 있던 물이잖아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건 얼음이 아니라 물이었겠지요. 보통 우리는 물이 살을 벨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방심하고 있다가 물 때문에 피를 본 거예요.
손발은 물론이고 얼굴, 온 몸에 매일마다 닿는 물이 손가락을 베었다는 사실은 아주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알맹이 못지 않게 껍데기도 중요하다는 시사점이요.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했지만.. 결국 우리의 피부에 닿는 것은 껍데기인지라 쿨하게 보낼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뿐 아니라, 사진을 찍고 좋았던 기억을 기록하는 것들이 모두 더 나은 껍데기를 만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반짝반짝 빛나는 알맹이를 다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만,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그 알맹이를 덮고 있는 껍데기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본질은 물이지만 얼음으로 변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을 벨 수도 있는 것처럼, 물 같은 본심이라 해도 얼음 같은 말로 어딘가 생채기를 낼 수도 있잖아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어디 물 같은 본심만 생기나요. 얼음장같이 차가운 본심이 스멀스멀 자리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게요. 얼음 같은 마음을 얼음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물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들기 때문에 차근차근 연습을 해 두어야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정확히 사랑하기 위해서요.
내 마음이 물 같고, 내 말이 물 같으면 얼음 같은 마음과 말도 유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한 사람 두 사람씩 물 같은 순간을 만들다 보면 세상은 전체적으로 조금 더 물 같아지겠지요. 안 그러고 배기나요. |